괴상한 학설이 교과서에 실리며 이승만을 국부라며 그가 저지른 모든죄악을 모른척눈감고 오히려
조그만 장점이라도 찾아 침소봉대하는 웃기는 현실이 되었죠.
암튼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입버릇처럼 애기하던 독실한 교회 장로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던
이승만이 지배하던 50년전 대한민국의 1960년 4.19일 화요일.
1960년 4.19일 그날은 지금와선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50년전 그날 한국에선 이승만정권의 불법부당선거에 항의하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해 반민주반자유부정부패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던
국민들에게
이승만정권은 실탄발사라는
무차별적인 학살로 인해
시민과 학생들이 서울에서만 104명 부산, 광주에선 27명이 이승만정권에 총살당했습니다.
전국적으로 계산하면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명, 무직자 33명, 대학생 22명, 국민학생·중학생 19명,기타 15명으로 총 186명이
이승만정부의 실탄발포에 아까운 생명을 잃고 6026명이 부상을 당해 끔찍한 피가 펑펑흐르던 날입니다.
결국 그래도 이승만이 계속 정권을 해먹겠다구 버티자
6일후인 4.25일 27개대학 258명의 교수님들이 이승만은 물러가라며 14개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그후 400명의 대학교수님들이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면서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부정 선거 다시 하라', '살인귀 처단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를 감행 서울시가를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4.25 교수단 데모는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아 다시 연이어 시민들과 학생들이 연이어 궐기하기 시작하고
이에 동북아의 미국 꼬봉 이승만을 지켜주던
주인국 미국 정부마저 이승만에게 하야하라고 하자
끝까지 버티던 이승만은 결국 4.26 10시에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을 사임한다고
하야성명을 발표 한후
환호하는 시민들이 파고다 공원에 있던 이승만의 동상 목에 줄을 걸고 끌고 다니는 가운데 (요즘 조선일보같은 찌라시들은
국부의 동상이 없는 건 이상하다고 개소리 찍찍거리고있죠. 어느 나라든 국민의적이었던 지도자의 동상은 없게마련이거늘..
통일후에 노동당이 정권잡으면아부하기 위해 북조선국부의 동상을 세우자고 할 쓰레기들..ㅡㅡ)
결국 12년간 잔인한 피의 철권독재를 휘두르던 독재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주혁명에 의해 쫓겨나 4.28에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갔다가
1960년 5월 29일 부인과 같이 국민들 몰래 미국의 하와이로 도망가 살다가
결국은 대한민국 으로 못 돌아오고 해외에서 뒤졌습니다.
다음은 이러한 시대 50년전 4.19 오늘 이승만정권의 총에 맞은 죽은 15살 한 여중생의 유서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봐서도 너무나도 그당시의 상황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영숙양(15세, 당시 한성여중 2년)의 유서>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 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윌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닌,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진영숙 양은 19일 오후 4시 학교를 파한 후 시위에 나가기에 앞서 홀몸인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일단 집에 갔다가 시장에 장사하러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편지를 써놓고 거리로 나섰다가
성북 경찰서 앞으로 이동하던 버스 에서 구호를 외치다가
(마치 월드컵때 울나라 팀이 이겼을때 걸거리에서 버스안에서도 대한민국!! 하며 했던 것처럼...)
버스안에까지 실탄 사격을 하던 경찰에 의해 총살 당했습니다.
갠적으로 이 어린 소녀의 이 유서를 보면 100%는 아니더라도
그당시 목숨걸고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다 돌아가시거나 다치신 분들의 생각 이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수가 있겠더군요.
근래 들어 반민주 비민주언론사들인 조중동같은 곳에서는 이승만을 다시본다며 미화를 하고 있지만 이 4.19 시기에 조국의 미래를 위해 힘쓰다가 진영숙 양과 같은 수많은 이름을 알수 없는 돌아 가신분들이 계시길래 오늘날 우리들이 예전에는 못누리던 엄청난 자유를 느낄수 있는 현실에서
그분들의 희생과 붉은 피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에서 역사를 거꾸로 할려는 무리들을 보면서 얼마나 분노를 느끼실지 못난 후손들에게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를 생각하면 이분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밖에 가질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지금 정치권에서 어느당이라도 419혁명에 대해 현재 대한민국을 이룩한 것으로 좋게 평가하는 것에 대해
심지어 현 대통령마저 4.19는 성공한 혁명이라고 하는판이니
위안을 삼을뿐입니다..
ps
이승만이 쫓겨나는 계기가 되었던 3.15부정선거 와 대학 교수단 시국 선언문관련 글과 사진입니다.
3·15 부정 선거 지시 비밀 지령
가. 4할 사전 투표 : 투표 당일 자연 기권표와 선거인 명부에 허위 기재한 유령 유권자표,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기권표 등을 그 지역 유권자의 4할 정도씩 만들어, 투표 시작 전에 자유당 후보에게 기표하여 투표함에 미리 넣도록 할 것
나.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 자유당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공작한 유권자로 하여금 3인조 또는 5인조의 팀을 편성시켜,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 상황을 확인한 후 다시 각 조원이 기표한 투표 용지를 자유당측 선거운동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넣도록 할 것
다. 완장부대 활용 : 자유당측 유권자에게 '자유당'이란 완장을 착용시켜 투표소 부근 분위기를 자유당 일색으로 만들어 야당 성향의 유권자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 자유당에게 투표케 할 것
라. 야당 참관인 축출 : 민주당측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투표소 밖으로 축출할 것
(『동아일보』, 1960년 3월 4일)
대학 교수단 시국 선언문(1960. 4. 25)
이번 4·19 참사는 우리 학생 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이요, 이 나라의 정치적 위길르 극복하기 위한 중대 사태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규정(糾正)이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우리 전국 대학교 교수들은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양심의 호소로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부정 선거 다시 하라', '살인귀 처단하라'
(『동아일보』1960. 4. 26)
다음사진은 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 조간 1면에 나온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행방불명되었다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상태로 마산 앞바다 에서 시체로 떠올라 발견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의 시체로
4.19혁명의 불을 당긴 경상남도 마산 시민의거의 도화선이 된 사진입니다.
위 글과 사진만 보더라도 이당시 이승만정권의 폭정이 어떠 했는지 왜 어린 여중생이 저런 일기를 쓰고 혁명에 가담했어야만 했는지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암튼 저때 피흘리며 돌아가신 수많은 분들..
그분들이 보시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그분들이 피를 흘리며 죽을 값어치가
있었던 모습이었는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좀 듭니다...
저분들이 타도했던 살인귀를 국부랍시며
찬양미화하는 반민주세력들이 광분하는 이때에
저때 돌아가신 분들이 중상을 입고 어떻게든 살아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60살전후일텐데..살아계셨다면
지금 한국의 모습을 어떻게 보실지..
암튼 오늘 하루...
다른 더 볼만한 많은 뉴스들이 있지만..
그래도 50년전에 누군가 우리들과 동갑이거나 연상이거나 아님
훨씬 어린 애들이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를 얻기 위해 피흘러 죽었다는 사실을
(당시 이승만정권이 사람을 너무 많이 총살하는 상황에서 국민학생 애들도
부모님 형,누나를 그만죽이세요 라며 시위에 나섰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많이 총맞아 죽었죠...)
그래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될려할때 외할아버지 집안인 혜경궁홍씨가문은 죽어라 반대를 하죠
남편죽이는거 까진 양보했던 혜경궁 홍씨는 아들만큼은 지킬려고 노력하구요.
더불러 나이 15살에 대비가된 50살차이나는 영조의 아내가 된 정순왕비집안도
양자를 맞거나 아들을 출산하면 왕이될수있다는 확신아래 사도세자죽이는데 이바지했었기에 왕되는 것을 반대하고
사도세자의 아들들을 다 죽일려는 음모를 꾸몄죠
(이것은 정조죽은후 정순대비가 조선을 결딴낸후 죽은후에 밝혀져 김씨집안과 강경벽파들이 다 망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저러한 힘든과정을 거쳐 왕이된 정조...
정조가 왕이되자 마자 외가쪽에선 무사들 수십명을 보내 궁궐담을 넘어 정조를 3번이나
죽일려고 발악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어머님 혜경궁홍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삼촌 외할아버지등등이 정조를 죽일려고 대궐에 무사들까지 보내는 판이니 결국 다 역모로 죽일수밖에 없게되죠(이부분은 드라마
이산에서도 오버하긴 했지만 잘 묘사되었었죠)
그러는 와중에 정순대비는 대비란 직위를 이용해서 툭하면 정조 근처의 신하들이나 내관들 시녀들을 매수해서 정조를 엿먹일려고
노력하고 역사상으로도 사도세자의 아들들..정조와 배다른 형제들을 죽일려고 발악을 하죠
사도세자죽이는데 앞장선 노론특히 그중 벽파들은 아주 노골적으로 정조를 왕으로 여기지 않고 덤빕니다
(정조역으로 나오는 안내상님.. pd말로는 이드라마에서 정조역은 별볼일없는거라고 애기하셨는데
실제론 보다보면 엄청 비중있습니다. 게다가 연기도 무지잘하시구요.
허나 당쟁은 줄지 않고 백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신료들도 백성들도 나를 탓하기 바쁘다.
나의 간절한 소망을 따랐다는 이유로 소중한 인재들은 죽어나가고...
내가 꿈꾸는 새로운 조선은 저만치서 다가오지 않는다.
나의 신념이 현실에 조롱당하고, 나의 꿈이 안타까운 희생을 키우는데... 포기하지 않는 나는 과연 옳은 것이냐...
너라면 어찌하겠느냐...
라고 할때..당시 드라마방송시점의 현실과 많이 오버랩되더군요 )
[개인적으로 요즘 안내상님은 뭐랄까 약간 오버하는 바람둥이 웃기는 케릭터로 많이 나오시지만
전 이드라마에서의 안내상님만을 기억하는 중입니다.^^;]
그들은 수도한양의 군사력과 상권을 거머지고 있어서 왕보다도 힘이셌죠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를 기린다는 핑계로 수원화성에 신하들이 아닌 자기에게만 복종하는 친위부대를 만들어 군사력쪽의 개혁과
수원으로의 천도를 준비하고
상권을 독점하고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상인들과 노론신하들의 힘을 줄이기 위해 금난전권폐지등 상업관련 개혁들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상놈들만 지던 군역의 의무를 양반에게도 매기면서 주류와 기득권세력이 정조에게 강하게 반발하던
조선의 마지막불꽃 개혁군주 정조시대말기가 드라마의 배경입니다.
헥헥..대충 드라마 배경시기 적는데 글이 길어졌네요,....^^;;;;;;;;
(이건 당시 한성별곡 드라마속의 현실과 실제 현실을 비교했던 영상)
암튼 한성별곡은 이쯤이 시작입니다.
과거 역모에 얽혀 아버지가 돌아가고
집안이 망한 나영이라는 여자는
(아버지덕에 신문물을 많이 접한 개명한 여성이었습니다.
집안의 종놈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좋아하는 남자와 자유연예도 하고
했었지만...)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죽고
어머니와 같이 관노가 되어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그와중에 어머니도 돌아가지고 본인도 관노라
여기저기서 양반들이나 남자들에게 강간당하는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죠
처음에는 은장도로 자신을 지켜보겠다고 노력하지만 결국 난중엔 하도 당하다 보니
이제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다가 살인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노론벽파계열의 살인집단에 들어가게 됩니다.
주로 의술...침과 약으로 사람을 죽이는 킬러로 단련된 나영이는
정조의 최측근으로 수도이전을 강하게 추진하던 시파계열의
이조판서를 기생으로 변장하여
약으로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저 살인집단에서 과거기록을 조작해서 왕에게 약을 바치는 궁녀역을 수행하게 해서
대비의 눈에 든후
왕옆에서 시중드는 역활도 하게되죠
왕이잘먹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독약을 이용해서 나영이가 민간에서
자행한 대량살인덕에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왕을 죽일려고 했죠
드라마상에서 대비의 명을 받아 정조를 죽일려고 하죠
( 당시 한성별곡 이부분 대본 :
임 금 : 이곳은 내 생부께서 태어나신 곳. 어린 시절 생부의 복수를 다짐하며 수도 없이 찾았던 곳이다.
이나영 : (천으로 고름을 천천히 닦아낸다)
임 금 : 굳이 이곳에서 치료 받겠다 고집한 이유는... 새 생명이 태어나듯... 새로운 조선을 이끌 강건한 힘을 되찾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나영 : (대야에 헹군다)
임 금 : 아귀처럼 이 복마전에서 살아남으려는 이유는, 고통 받는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다.
이나영 : (우뚝 멈춰서는 손)
임 금 : 나의 간절한 소망은 그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하다. 때문에 그 누구도 나를 죽일 수 없다.
이나영 : (임금의 등을 쏘아보며 떨리는 눈동자)
갠적으로 tv에서 이부분을 보면서 나의 간절한 소망은 그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하다. 때문에 그 누구도 나를 죽일 수 없다. 라고 말하는 부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왕도 대충 나영의정체를 눈치채고 있는 가운데 하는 말인데 안내상님은 마치 정조가 다시 환생한것처럼 느껴지더군요^^; )
그전에
왕이 수도이전과 육의전의 독점권폐지에 항의하는 백성들과 직접 자리를 마주하고 애기하는 자리에서
노론벽파쪽에서 보낸 자객이 왕을 죽일려고 할때 나영의 전 연인이자 남자 주인공중 하나가 대신 자객의 칼을 맞고
죽을려고 할때 그를 간신히 살려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그녀가 장안의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킬러라는것을 알아채고
결국 조직에서 그사실을 알고있는 그를 죽이라고 할때
죽이러 왔다고 사실대로 말하고
조용히 죽이겠다고 하죠..
이넘은 죽어가면서도 독살당했다는 것을 인정안하고
자기가 술이과해 몸이 불편한것일뿐이라며
절대로 여자책임이 아니라구 하죠
머 나름 사랑의 방식인듯..
일말의 가책은 있는지 눈물을 흘리더군요..
제가 주로 여자주인공 나영의 입장에서 글을썼지만
나영말고도 많은 개성굵직한 역들이 많이 나옵니다
(나영이가 암살자가 되기전에 자주쓰던 소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루겠는가.. 가는 요즘 제 대화명이죠^^; 드라마상에선 이말 덕에 건달이 포졸이 되었고 종놈이 잘나가는 상인이 되었는데 진작 이말을 사용했던 나영이는 세상이 내가알던세상이 아니더군요....라면서 변했지만..)
종이었다가 역관일을 하다 육의전 시전 상인들 총행수가 된 양만오
총행수가된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맙습니다. 미력한 저에게 시전 전체의 총행수라는 중책을 맡겨주신 여러 행수어르신, 기꺼이 주인권을 양도해주신 여러 객주 어르신, 그리고 저와 함께 앞으로 조선팔도를 휘어잡을 상인여러분, 반갑습니다.
사농공상이라 우리는 가장 천대받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그리 만들었습니다!
하루 벌어먹기에 급급해 민초들에게 부정을 일삼고 폭리를 취해 온 우리 장사치들에게, 그런 대접은 당연합니다... 허나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가진 자들에게 비싸게 팔고, 그 이문으로 민초들에게는 싸게 팔 것입니다. 하여 조선의 민초들은 굶주림의 고통을 덜 것이며, 그 잘난 양반 사대부들보다 우리 상인을 더 믿고 따를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이땅에 나고 자랄 우리 후손을 위함입니다. 천하게 태어나 천대받고 살았다하여 언제까지 그리 살 순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풍족하게 할 것이며! 우리는! 스스로를 대접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 잘난 양반 사대부 부러울 게 무업니까? 그리할 때! 우리가 그들보다 못할 게 무업니까?
우리와 우리를 믿고 의지할 민초들이 풍요롭고 행복한 것이! 바로 이나라 조선이 풍요롭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랏님과 양반네들이 가진 총과 칼이 아니라! 바로 나 양만오와 여러분이 가진 돈의 힘으로만 만들 수 있습니다!
돈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 우리 상인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 언젠가 반드시 옵니다, 여러분!
라고 말하는 부분 어떻게 보면 감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드마라상에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현기득권세력인 노론벽파와 야합하여
그들에게 뒷돈을 대주고 보호를 받으며 정조가 행하는 여러개혁들을 방해하고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습니다.
그래서 왕의정책을 파탄내기 위해 자기편을 들어준 사람들과도 //////////////////////
양만오 : 점방 문을 이틀에 하루씩, 한 집 걸러 한 집씩 열고, 내놓는 물건의 수량도 반으로 줄이라 이르십시오.
공행수 : 그럼 장사를 안 하는 만큼 손해 보는 건 어쩌나?
양만오 : 물건이 딸려 아우성치는 만큼 담합한 가격을 차차 올리면, 소량을 팔아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다음과 같은 죄를 저지른 재범자에게 과연 한국처럼 술먹어서...라면서 딸랑12년만 줄건지 의아할뿐이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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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계획 쌈 131화
인터뷰내용
김영재(가명)/나영이아버지: 아저씨가 너 교회 다니니 묻어래요. 그래서 아니라고 그러니까 입을 막고 번쩍 안고 건물 1층현관으로 들어간 거에요. 바지를 내리고 하라고 시키더래요. 그래서 나는 못한다, 못한다 그러니까 주먹으로 얼굴을 그냥 사정없이 때린거죠. 그리고서는 목을 조르고 화장실변기에다가 몇번을 밀쳤나봐요 내 생각엔 밀어 냈겠죠. 그충격에 애가 말을 하려 그래도 말이 안나오더래요. 목을 졸라 애가 실신한 상태에서 그 뒤에는 어떻게 됐는지 자기도 모르는 겁니다. 7시간인가 8시간인가 수술을 했어요. 대수술 했죠. 그래서 지금 현재 대장에서 항문까지 없어요.
늘어져 내려온게 항문이고 여자 생식기가 다 찢어져서 살이 헤져서 대장이 쏟아져 나온거예요. 그래서 소장끝을 잘라서 배꼽 옆으로 뽑아내고 나머지는 직장이니, 대장이니 없어요. 항문도 다 떨어져 나가버렸어요. 여자 생식기가 80%훼손돼서 없어요.
진단서의 내용: 성폭력으로 추정되는 완력에 의해 항문 및 회음부 파열. 직장 및 전대장 파열. 질파열등.....(중략) 2008년 12월 11일 전대장 절제술 및 영구적 회장루 조성술 질성형술 회음부 ....(중략) 등을 시행 하였으며 .....(생략) -영구적 항문소실 및 괄약근 파열. 영구적 회장루 라는 진단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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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나이는 57. 전과여러번있는 재범.. 아이의 나이는 9.
한 사람의 인생을 처참히 짓밟아 놓았는데
술먹고 정신이없는 상태서 한짓이라 고작 12년형. 말도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술에 취했던 안취했던 일단 사람이고
'결과'가 저렇게 처참한데
술취했다는 이유로 12년이라니 이러니 한국이 강간천국어짜구 하는 애기가 이젠 상식이 되가는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들같으면 저런짓을 해놓고
고작 징역12년받는 웃기는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더웃기는것은
가해자 그 X넘은 이것도 형량이 너무하다며 항소를 했답니다.
진짜 술쳐먹고 한범죄라면 술깼으면 배가르고 자살이라도 해야 할판에 오히려 형량이 너무 막중하다며(일반적으로 저런죄에 3년만 받아도 중형이라고 하긴 하죠. )
항소거치면 보통 형량이 주는 우리나라현실상
답답해지더군요.
후진국이라고 보통 생각하는 중국에서처럼 저런강력범죄는 그냥 총살을 시켜야 하는 넘이라고 생각듭니다
그래서 5.18당시 광주사람들 학살하던 전두환이보낸 공수부대의 탄약보급을 미군이 눈감아줘서
광주학살에 미군이 책임이있다는 말들이 나오죠
)
반대로 군대를 이용한 방법을 포기한후
체육관에서 전두환에의해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or 임명)된 노태우가
6월29에
대통령을 체육관이 아닌
국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로 뽑겠다는 대국민항복선언을 하게 만들었죠.
그결과는 불과 20년전만 해도 대통령모독죄니 이런게 있던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언론 자유를 누릴수있는 시대가되었구요..
지금와서 저 사진들에 나오거나 안나오는 죽어간 수많은 분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들이 당시독재정권에 살해되지 않구 오늘날까지 살아게신다면 나이는
이제 40살전후일테구 결혼을
하셨다면 중학교다 고등or대학교
다니는 애1,2정도를 가진 중년남자들로서 일반인들 처럼 정상적인 보통의삶을 사셨을건데...
아니면 요즘은 때가때인만큼 촛불들고 가족들과 같이 나왔을지도...
그렇지 못하고 당시 시대상황속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수많은 분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분들이 바라던 국가가되었는지...
대통령당시 때먹은 국민혈세 수조원에 대한 벌금으로 몇천억원내라고 하니까 2~300억만 내놓곤
나머지는 못내겠다면서 29만원밖에 없다고 아내명의의 수십억짜리 집에서 버티는 전두환을 보면
서...
그분의 아들(아들중에 하나는 국내3대 출판사인 재산600억원의 시공사 사장님이시죠..
나머지도 당 강남땅부자들..) 딸들
게다가 재산이 보통 20,30~40억원대라는 손자손녀들(
어린나이네 벌써 수십억원짜리 빌딩을 몇채가지고 있는 그손녀중의 하는 몇년전 유럽
여행갔다와서 싸이에 유럽이 한국보다 멋있다..한국은 후지다이러다가 난리났었죠..)
잘먹고잘사는 현실을 보면서..뭔가 아이러닉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도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몇백명이 모여 뽑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국가라고 구라치는 개념없는 국가였다면
우리나라가 지금도 맘에 안드는 것이 많지만 더 쫍팔렸을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22 년전 이때쯤 지금 저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하신 수많은 분들..
그리고 그 희생때문에 고통받고 사는 수많은 분들..
에게 고마움이 느껴지네요..더불어 저런게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촛불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ps
mms://mms.plsong.com/plsong/bob/hanyeol/hanyeol_b06.wma 한 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이한열열사 장례식때 나오는 음악인데 중간중간에 고 문익환 선생님이 당시 죽어간 수많은 분들 이름을 하나 하나 열거하시는데 갠적으로 눈물이 나올뻔했죠.. 동영상으론 http://www.mgoon.com/mulpi/Mov/CommonView.aspx?VID=668082 추천드립니다
덕수궁왼쪽길은 이유는 모르겠는데 전경부대가 진을 치고 있더군요..앞쪽으로 보이는 것은 서울시립미술관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사이에 있던 자전거 택시입니다. 가격은 기억이 안나네요..^^;
당시 미술관앞에 있던 인형(??) 첨에 멀리서 봤을때 귀달린 모자를 쓴 사람인줄 알았죠..^^;
여기저기 보이는 소화기..빨간색이라 주위와 좀 부조화스러웠습니다. 안보이게 하거나 색깔좀 바꿨으면? 해봤다는..^^;
시청앞광장에서 바로 보이는 덕수궁 입구입니다.
요즘 이앞은 경찰말그대로라면 상부의지시없이 지네맘대로 깽판치는 의경들이
사람들에게 천인공노할 공분을 사는 중이라 자주 TV에 나오더군요
ps 1
일제때 일본넘들에 의한 파손이야 그렇다 치고 해방후에도 덕수궁은 1960년 대 들어서 태평로 일대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담장이 허물어져 나갔고 대한문으로부터 태평로 파출소까지 6m 안쪽으로 도로를 넓히면서 담장을 허물고 돌담 대신 철책으로 다시 담장을 치게되었구 결국 다시 복구하는데 10년이걸렸었죠..
그러다가 창경궁안에다 동물원 있던것처럼 당시 서울시는 덕수궁을 도시민의 공원, 놀이공간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궁내에 스케이트 장을 만들고, 벤치를 놓는가 하면은 상점과 음식점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분들에의해 많은 비판을 받다가 어느정도 복원되어 오늘날의 모습이 되긴 했지만..궁궐의 면모를 지금으로선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ps 2
전체적으로 아무래도 시청근처라 그런지 고궁근처에서 어떻게 찍어도 현대빌딩들이 같이 보이는게..좀 그렇더군요.
서구선진국들은 고궁근처에 현대적인 건물을 안짓는다고 들어거든요.
참고로 옆에 서울시청이 있는데 곧 20층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신청사가 생긴다고 해서 말이 많습니다.
서울시에서 조만간 경복궁앞 에 30층짜리 빌딩 3개(경복궁에서 100M도안된위치인데 경복궁이 문화재이지 담은 문화재가
아니라 그 근처에 지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서 말이 많죠..ㅡ.)와 연관되어..계획대로 다 지어지면 경복궁이나 덕수궁이나...
2. 메이데이에 민족 해방을 외치다 노동자의 성장과 처음 맞은 메이데이 뜨거워진 메이데이 투쟁 지하로 숨어들어 격문을 뿌리다 항일 무장 투쟁과 함께하다
3. 해방 공간의 메이데이를 가다 전평의 지도 아래 노동자가 하나 되다 변질되어 가는 메이데이
4. 빼앗긴 메이데이와 다시 찾은 메이데이 빼앗긴 메이데이 근로자의 날 어용 노조 한국노총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성장 아! 다시 찾은 메이데이
[정운영의 如是我讀 나는이렇게 읽었다] 메이 데이의 핏빛 역사
고대인들은 5월 첫날 플로랄리아(Floralia) 축제를 열었다. 봄과 꽃의 여신 플로라를 기리는 이 축전은 단연 장미와 장밋빛 잔치였으리라. 기원전 253년 로마에서 비롯된 이 축제일에 즈음해서 현대인은 메이 데이(May Day) 행사를 치른다.
그러나 5월의 잔치답지 않게 메이 데이에는 피와 핏빛 얼룩이 가득하다. 역사학연구소가 집필한 『메이데이 100년의 역사』(서해문집, 2004)는 이런 얘기로 시작된다.
한쪽에는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 말아 피우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7~8달러의 주급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판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개들의 세계는 절대로 그렇지 않으렷다.
이런 세상은 바뀌어야 하기에 미국노동총연맹(AFL)은 하루 8시간 노동을 내걸고 1886년 5월 1일 총파업을 단행했다. 시카고 시위에서는 3일 파업자에 대한 경찰 발포로 4명이 죽었다.
4일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린 항의 집회에 폭탄이 터져 경관 7명이 숨지고, 대응 사격으로 2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노조 지도자 8명을 범인으로 기소한 당국은 이듬해 처형 4명, 종신형 2명, 옥중 자살 1명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그러나 그것은 재판이 아니라 재판을 빌린 살인이었다. 피고인들의 성향이 무정부주의자라는 것뿐 어떤 유죄 증거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후 진술에서 그들 중의 하나는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 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27쪽)고 외쳤다.
그는 또 “우리의 침묵이 오늘 우리의 목을 매다는 당신들의 사형 명령보다 훨씬 강력해지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28쪽)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대에 올랐다. 오죽했으면 런던에서 버나드 쇼가 “세상이 8명의 인민을 잃느니 일리노이 주 대법원의 법관 8명을 잃는 편이 낫다”고 직격탄을 날렸을까.
뒷날 재조사로 주지사는 그들의 혐의를 벗겨주었으나 6년 전에 가져간 목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제2 인터내셔널은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만국 노동자의 시위’를 선언했다. 메이 데이의 효시였다.
정작 유혈로 메이 데이를 연출한 미국은 9월 첫 월요일을 ‘노동의 날’로 정해 딴판을 벌이고 있다.
메이 데이는 박래품(舶來品)이지만 반갑게도 이 책은 ‘메이 데이의 한국사’를 들려준다. 식민지 조선 노동자의 메이 데이 행사는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의 장이었다. 일제는 메이 데이 탄압에 혈안이 되었으며,
1924년 5월 2일 조선일보는 “시가에는 기마 순사의 말 자취 소리가 요란하고 사상 단체의 사무소 앞에는 사복 형사가 지켜 서서 무엇인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무산자는 소리 없이 압박에 묻혀 있고 그 대신에 경관대가 메이 데이를 축하하는 듯하더라”(57쪽)라고 썼다. 일제가 전쟁 준비에 광분하던 1938년 메이 데이도 ‘근로일’로 창씨 개명을 한다.
해방 공간에서 노동 운동을 주도한 것은 좌익계 전평(全評)이었다. 군정은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등 ‘정치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1947년 전평을 불법화했다. 대한노총이 이승만 정권의 충복이 되었는데,
일례로 1956년 메이 데이 개회식에서 “이번 선거에서는 노동자의 은인인 이승만 박사를 절대 지지하자”(123쪽)고 용비어천가를 읊조릴 정도였다. 메이 데이는 공산 괴뢰 도당의 선전 도구라는 이승만의 훈시에 따라 1957년 대한노총은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하고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생일을 바꾼 것이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개칭했다. 근로자란 지칭에는 천황과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일제의 통치 음모가 배었다고 한다.
군사 정권의 시녀를 자임한 한국노총은 박정희의 유신 정변이 “구국 통일을
위한 영단”이고, 전두환의 독재 연장 기도마저 위기 해소를 위한 결단이라고 칭송했다
.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잡는 데는 전태일의 분신과 김경숙의 죽음에서 6월 대항쟁까지 엄청난 투쟁과 희생이 따랐다.
드디어 1989년 재야의 민주 노동 세력은 “민주적인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탄압의 상징인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함과 아울러 메이 데이를 우리의 진정한 노동절로 엄숙히 선포한다”(208쪽).
그리고 1990년 메이 데이 기념 100년 만에 민주노총의 누룩 전노협이 결성된다.
이 책은 치열한 시대에 대한 치열한 보고서이다.
그래서 오늘의 눈으로 읽자면 다소 튀는 부분도 없지 않다. 1904년 4월 레닌은 “낡은 러시아는 죽어가고 있다. 자유로운 러시아가…다가오고 있다”(178쪽)고 치열한 레토릭의 메이 데이 기념사를 썼다.
2004년 4월 그 자유로운 러시아는 어디 있는가? 그것도 역사의 간지(奸智)라면 해방 공간에서의 함성대로‘노동자 환희의 날 메-데-’가 자본가의 대액일(大厄日)일 필요는 없으리라. 장미는 핏빛도 아름다우니!
괴상한 학설이 교과서에 실리며 이승만을 국부라며 그가 저지른 모든죄악을 모른척눈감고 오히려
조그만 장점이라도 찾아 침소봉대하는 웃기는 현실이 되었죠.
암튼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입버릇처럼 애기하던 독실한 교회 장로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던
이승만이 지배하던 49년전 대한민국의 1960년 4.19일 화요일.
1960년 4.19일 그날은 지금와선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49년전 그날 한국에선 이승만정권의 무차별적인 학살로 인해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해 반민주반자유부정부패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던
시민과 학생들이 서울에서만 104명 부산, 광주에선 27명이 이승만정권에 총살당했습니다.
전국적으로 계산하면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명, 무직자 33명, 대학생 22명, 국민학생·중학생 19명,기타 15명으로 총 186명이
이승만정부의 실탄발포에 아까운 생명을 잃고 6026명이 부상을 당해 끔찍한 피가 펑펑흐르던 날입니다.
결국 그래도 이승만이 계속 정권을 해먹겠다구 버티자
6일후인 4.25일 27개대학 258명의 교수님들이 이승만은 물러가라며 14개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그후 400명의 대학교수님들이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면서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부정 선거 다시 하라', '살인귀 처단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를 감행 서울시가를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4.25 교수단 데모는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아 다시 연이어 시민들과 학생들이 연이어 궐기하기 시작하고
이에 동북아의 미국 꼬봉 이승만을 지켜주던
주인국 미국의 정부마저 이승만에게 하야하라고 하자
끝까지 버티던 이승만은 결국 4.26 10시에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을 사임한다고
하야성명을 발표 한후
환호하는 시민들이 파고다 공원에 있던 이승만의 동상 목에 줄을 걸고 끌고 다니는 가운데
결국 12년간 잔인한 피의 철권독재를 휘두르던 독재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주혁명에 의해 쫓겨나 4.28에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갔다가
1960년 5월 29일 부인과 같이 국민들 몰래 미국의 하와이로 도망가 살다가
결국은 대한민국 으로 못 돌아오고 해외에서 죽었습니다.
다음은 이러한 시대 49년전 4.19 오늘 이승만정권의 총에 맞은 죽은 15살 한 여중생의 유서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봐서도 너무나도 그당시의 상황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영숙양(15세, 당시 한성여중 2년)의 유서>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 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윌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닌,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진영숙 양은 19일 오후 4시 학교를 파한 후 시위에 나가기에 앞서 홀몸인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일단 집에 갔다가 시장에 장사하러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편지를 써놓고 거리로 나섰다가
성북 경찰서 앞으로 이동하던 버스 에서 구호를 외치다가
(마치 월드컵때 울나라 팀이 이겼을때 걸거리에서 버스안에서도 대한민국 하며 했던 것처럼...)
버스안에까지 실탄 사격을 하던 경찰에 의해 총살 당했습니다.
갠적으로 이 어린 소녀의 이 유서를 보면 100%는 아니더라도
그당시 목숨걸고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다 돌아가시거나 다치신 분들의 생각 이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수가 있겠더군요.
근래 들어 어떤 반민주 비민주적인 신문사들은 이승만을 다시본다며 미화를 하고 있지만 이 4.19 시기에 조국의 미래를 위해 힘쓰다가 진영숙 양과 같은 수많은 이름을 알수 없는 돌아 가신분들이 계시길래 오늘날 우리들이 예전에는 못누리던 엄청난 자유를 느낄수 있는 현실에서
그분들의 희생과 피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에서 역사를 거꾸로 할려는 무리들을 보면서 얼마나 분노를 느끼실지 못난 후손들에게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를 생각하면 이분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밖에 가질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지금 정치권에서 어느당이라도 419혁명에 대해 현재 대한민국을 이룩한 것으로 좋게 평가하는 것에 대해
심지어 현 대통령마저 4.19는 성공한 혁명이라고 하는판이니
위안을 삼을뿐입니다..
ps
이승만이 쫓겨나는 계기가 되었던 3.15부정선거 와 대학 교수단 시국 선언문관련 글과 사진입니다.
3·15 부정 선거 지시 비밀 지령
가. 4할 사전 투표 : 투표 당일 자연 기권표와 선거인 명부에 허위 기재한 유령 유권자표,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기권표 등을 그 지역 유권자의 4할 정도씩 만들어, 투표 시작 전에 자유당 후보에게 기표하여 투표함에 미리 넣도록 할 것
나.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 자유당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공작한 유권자로 하여금 3인조 또는 5인조의 팀을 편성시켜,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 상황을 확인한 후 다시 각 조원이 기표한 투표 용지를 자유당측 선거운동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넣도록 할 것
다. 완장부대 활용 : 자유당측 유권자에게 '자유당'이란 완장을 착용시켜 투표소 부근 분위기를 자유당 일색으로 만들어 야당 성향의 유권자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 자유당에게 투표케 할 것
라. 야당 참관인 축출 : 민주당측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투표소 밖으로 축출할 것
(『동아일보』, 1960년 3월 4일)
대학 교수단 시국 선언문(1960. 4. 25)
이번 4·19 참사는 우리 학생 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이요, 이 나라의 정치적 위길르 극복하기 위한 중대 사태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규정(糾正)이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우리 전국 대학교 교수들은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양심의 호소로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부정 선거 다시 하라', '살인귀 처단하라'
(『동아일보』1960. 4. 26)
다음사진은 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 조간 1면에 나온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행방불명되었다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상태로 마산 앞바다 에서 시체로 떠올라 발견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의 시체로
4.19혁명의 불을 당긴 경상남도 마산 시민의거의 도화선이 된 사진입니다.
위 글과 사진만 보더라도 이당시 이승만정권의 폭정이 어떠 했는지 왜 어린 여중생이 저런 일기를 쓰고 혁명에 가담했어야만 했는지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암튼 저때 피흘리며 돌아가신 수많은 분들..
그분들이 보시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그분들이 피를 흘리며 죽을 값어치가
있었던 모습이었는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좀 듭니다...
저분들이 타도했던 살인귀를 국부랍시며
찬양미화하는 반민주세력들이 광분하는 이때에
저때 돌아가신 분들이 중상을 입고 어떻게든 살아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60살전후일텐데..살아계셨다면
지금 한국의 모습을 어떻게 보실지..
암튼 오늘 하루...
다른 더 볼만한 많은 뉴스들이 있지만..
그래도 49년전에 누군가 우리들과 동갑이거나 연상이거나 아님
훨씬 어린 애들이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를 얻기 위해 피흘러 죽었다는 사실을
(당시 이승만정권이 사람을 너무 많이 총살하는 상황에서 국민학생 애들도
부모님 형,누나를 그만죽이세요 라며 시위에 나섰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많이 총맞아 죽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