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3일 토요일 향년 82살로 이소선 여사가 돌아가셨습니다


한때는 하루15시간의 강압적인 노동에 한대하며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며

분신자살하신 전태일의 어머니로 유명하셨지만 



이젠 한국노동자들의 대모로 유명하신분이죠


그분이 돌아가시자 마자 한국의 이름좀있다는  정당들은 


자유선진당 임영호 대변인 "평생 노동자와 함께한 이 여사의 명복을 빈다. 당신은 노동자의 참 어머니였다" 


한나라당 김기현 대변인 "참 안타까운 일이다. 삼가 조의를 표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민주당 이용섭 대변인 "이 여사는 아들의 뒤를 이어 `노동자들이 기를 펴고 사는 사회,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민주당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이 땅의 사회 정의를 바로세우는 데 더욱 힘쓸 것"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40년 동안 `살아있는 전태일'이 돼 노동자들을 위로해줬다"라며 "비통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다"고 애도를 표시하고


진보신당 강상구 대변인은 "이소선 어머니는 40년 동안 대한민국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동지였다 살아 생전 꿈꿨던 노동자 해방을 이루는 그 날까지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라며 애도를 하고계시며


유명인사들도


한나라당 이재오 특임장관은 "어머니가 전에 모란공원 묘지가 부실한 게 많다며 초라해지지 않도록 관리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본인이 그리 가시게 됐다"며 "친어머니처럼 모시던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어르신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 참담한 심정"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아들의 분신처럼 살아온 어머니가 없으면 전태일도 없었다"며 "한 사회 전체의 빛과 같은 존재를 잃어 무척 안타깝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원내대표도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입성했을 때 정말 기뻐하셨는데, 진보정당이 다시 하나 돼 새로운 정치를 만드는 것을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이정희 대표는 트위터에 "이소선 어머님께서 전태일 열사 40주기에 남기신 말씀, '노동자는 하나다. 땀흘려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뭉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진리, 잊지 않겠습니다. 고우신 어머님, 고마운 어머님, 이제는 편히 쉬소서"라는 글을 남겼고, 


유시민 대표도 "어머니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드님과 만나시고 차별도 억압도 없는 하늘의 평안을 누리소서"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이소선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일은 김진숙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셨다"며 "'절대로 죽어서는 안된다. 진숙이는 귀한 사람이다. 반드시 살아서 내려와 싸워야한다'…남기신 말씀대로 꼭 김진숙을 살려 내겠습니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역시 트위터를 통해 "하늘을 우러러 이소선 '어머님' 소천을 고하고 명복을 빕니다"라고 밝히면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당시 대학 2년생의 의식과 삶을 바꾸었는데 여사님의 혁명적인 80여 성상 삶은 이 땅의 소금과 빛으로 일하는 소외된 모든 이들 가슴을 따뜻하게 하였습니다"라고 고인의 넋을 기렸다. 


방송인 김미화씨는 "사진 한 장에서 무한한 의미와 감동이 양산되는 경우, 많지 않지요"라며 '아들 전태일 열사 영정을 품에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소선 여사님, 영원히 편히 쉬소서"라고 애도했고, 


방송인 김제동씨도   빈소를 찾아 "계셔주시는 것만으로도 절박한 사람들의 입장을 알아주고 들어주는 역할을 하셨다"며 비통해하고 


한승헌 변호사는 "하늘나라에 가면 '소선'이 아닌 '대(大)선'이 되실 것"


배우 김여진씨는 "이소선 어머니, 편안하고 가볍게 좋은 곳에서 웃고 계셔주세요"등등

 

한국의 모든 정당들과 각계인사들이 애도하는 이소선 여사님...




그분의 삶의 행적이


곧 한국사회 노동운동의 역사라고 불리어지죠


독재정권들에 툭하면 잡혀가고 쫗겨다니시던 


이소선 여사가 계셨기에(법정에서 판사들에게


노동자들에게 노동3권을 가르치는게 왜 죄가되냐? 이러다가 법정구속이되기도하셨죠)


 1987년 6월항쟁후 


노동자들의 권익과처우가 크게 향상되게 되어


그이후 노동자들의 연봉,월급향상에 이에따른 


중산층의 발전에 큰역할을 하신 


고인이 결국 향년81살로 가시고


  그 빈소는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장기표 전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빈소를 지키고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민주당 손학규 대표,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 진보신당 노회찬 고문,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 공성경 창조한국당 대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 정치권과 노동계, 

시민사회단체 등 각계에서 보내온 화환이 빈소를덮고 계시며 


그분의 돌아가심을 안타까워하는 현실..


먼저간 아들앞에 떳떳하게 한평생살아가신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삼가고인의 명복일 빕니다...ㅠㅜ

 

ps








 

오늘은 사회주의권이나 자본주의국가들 기타 이슬람권도 거의다 쉰다고 하고요.

 

웅..뭐 우리한국은 아직 100% 다 쉴수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쉬는 분들 좀이라도

 

있는 상황에서 

 

5/1일을 전세계적차원에서 쉴수있는 기념할만한 날로 있게 해주신 120여년전 미국노동자들에게

 

(참고로 유혈낭자한 메이데이를 만들게 했던 미국은

 

5/1일을 피해서 9월 첫 월요일을 ‘노동의 날’로 하고있습니다)

 

그리고 20 년전의 한국노동자들에게 늦었지만 경의를 보냅니다.

 

 

ps

 

그런데 작년에 2mb 똘아이정부는

 

과거엔 급격한 성장과 물가상승으로 매년 임금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제는 비효율적이란 지적이 (재벌들로부터 나와)  노사 임금교섭을 2~3년에 한번씩,

단체교섭과 함께 하는게 바람직하다는 개풀뜯어먹는 소릴하다가 욕쳐먹었는데 요즘도 계속 추진중인지 모르겠군요

 

 

울나라 땅값 집값 교통비 공공비 생활비등등 올라가는 속도가 선진국포함중진국중에서 (경제공황으로각국이 디플레이션에 빠진 가운데

 

유일하게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물가로 국민들이 고통받는게)

세계1,2위인 주제에 저런 소리를 하니 절라 재수없었는데..

 

암튼

 

제가 몇년전 5/1일관련해서 읽은

 

책값이 7천원인가? 밖에 안하는 얇은 책인데 짬날때 보시면

 

재밌어서 소개합니다.^^;

 


 

 

 

 

 

[도서] 서해역사문고-03 메이데이 100년의 역사

 

  

 

차례

1. 메이데이란 무엇인가
메이데이가 시작되다
메이데이 행사는 어떻게 치러졌는가
메이데이의 의의

2. 메이데이에 민족 해방을 외치다
노동자의 성장과 처음 맞은 메이데이
뜨거워진 메이데이 투쟁
지하로 숨어들어 격문을 뿌리다
항일 무장 투쟁과 함께하다

3. 해방 공간의 메이데이를 가다
전평의 지도 아래 노동자가 하나 되다
변질되어 가는 메이데이

4. 빼앗긴 메이데이와 다시 찾은 메이데이
빼앗긴 메이데이
근로자의 날
어용 노조 한국노총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성장
아! 다시 찾은 메이데이

 

 

 

 

[정운영의 如是我讀 나는이렇게 읽었다] 메이 데이의 핏빛 역사

고대인들은 5월 첫날 플로랄리아(Floralia) 축제를 열었다. 봄과 꽃의 여신 플로라를 기리는 이 축전은 단연 장미와 장밋빛 잔치였으리라. 기원전 253년 로마에서 비롯된 이 축제일에 즈음해서 현대인은 메이 데이(May Day) 행사를 치른다.

 

그러나 5월의 잔치답지 않게 메이 데이에는 피와 핏빛 얼룩이 가득하다. 역사학연구소가 집필한 『메이데이 100년의 역사』(서해문집, 2004)는 이런 얘기로 시작된다.

 

한쪽에는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 말아 피우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7~8달러의 주급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판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개들의 세계는 절대로 그렇지 않으렷다.

 

이런 세상은 바뀌어야 하기에 미국노동총연맹(AFL)은 하루 8시간 노동을 내걸고 1886년 5월 1일 총파업을 단행했다. 시카고 시위에서는 3일 파업자에 대한 경찰 발포로 4명이 죽었다.

4일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린 항의 집회에 폭탄이 터져 경관 7명이 숨지고, 대응 사격으로 2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노조 지도자 8명을 범인으로 기소한 당국은 이듬해 처형 4명, 종신형 2명, 옥중 자살 1명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그러나 그것은 재판이 아니라 재판을 빌린 살인이었다. 피고인들의 성향이 무정부주의자라는 것뿐 어떤 유죄 증거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후 진술에서 그들 중의 하나는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 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27쪽)고 외쳤다.

 

그는 또 “우리의 침묵이 오늘 우리의 목을 매다는 당신들의 사형 명령보다 훨씬 강력해지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28쪽)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대에 올랐다. 오죽했으면 런던에서 버나드 쇼가 “세상이 8명의 인민을 잃느니 일리노이 주 대법원의 법관 8명을 잃는 편이 낫다”고 직격탄을 날렸을까.

 

뒷날 재조사로 주지사는 그들의 혐의를 벗겨주었으나 6년 전에 가져간 목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제2 인터내셔널은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만국 노동자의 시위’를 선언했다. 메이 데이의 효시였다.

 

정작 유혈로 메이 데이를 연출한 미국은 9월 첫 월요일을 ‘노동의 날’로 정해 딴판을 벌이고 있다.

메이 데이는 박래품(舶來品)이지만 반갑게도 이 책은 ‘메이 데이의 한국사’를 들려준다. 식민지 조선 노동자의 메이 데이 행사는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의 장이었다. 일제는 메이 데이 탄압에 혈안이 되었으며,

 

1924년 5월 2일 조선일보는 “시가에는 기마 순사의 말 자취 소리가 요란하고 사상 단체의 사무소 앞에는 사복 형사가 지켜 서서 무엇인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무산자는 소리 없이 압박에 묻혀 있고 그 대신에 경관대가 메이 데이를 축하하는 듯하더라”(57쪽)라고 썼다. 일제가 전쟁 준비에 광분하던 1938년 메이 데이도 ‘근로일’로 창씨 개명을 한다.

 

해방 공간에서 노동 운동을 주도한 것은 좌익계 전평(全評)이었다. 군정은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등 ‘정치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1947년 전평을 불법화했다. 대한노총이 이승만 정권의 충복이 되었는데,

 

 일례로 1956년 메이 데이 개회식에서 “이번 선거에서는 노동자의 은인인 이승만 박사를 절대 지지하자”(123쪽)고 용비어천가를 읊조릴 정도였다. 메이 데이는 공산 괴뢰 도당의 선전 도구라는 이승만의 훈시에 따라 1957년 대한노총은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하고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생일을 바꾼 것이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개칭했다. 근로자란 지칭에는 천황과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일제의 통치 음모가 배었다고 한다.

 

군사 정권의 시녀를 자임한 한국노총은 박정희의 유신 정변이 “구국 통일을

 위한 영단”이고, 전두환의 독재 연장 기도마저 위기 해소를 위한 결단이라고 칭송했다

.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잡는 데는 전태일의 분신과 김경숙의 죽음에서 6월 대항쟁까지 엄청난 투쟁과 희생이 따랐다.

 

드디어 1989년 재야의 민주 노동 세력은 “민주적인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탄압의 상징인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함과 아울러 메이 데이를 우리의 진정한 노동절로 엄숙히 선포한다”(208쪽).

 

그리고 1990년 메이 데이 기념 100년 만에 민주노총의 누룩 전노협이 결성된다.

이 책은 치열한 시대에 대한 치열한 보고서이다.

 

 

그래서 오늘의 눈으로 읽자면 다소 튀는 부분도 없지 않다. 1904년 4월 레닌은 “낡은 러시아는 죽어가고 있다. 자유로운 러시아가…다가오고 있다”(178쪽)고 치열한 레토릭의 메이 데이 기념사를 썼다.

 

 

2004년 4월 그 자유로운 러시아는 어디 있는가? 그것도 역사의 간지(奸智)라면 해방 공간에서의 함성대로‘노동자 환희의 날 메-데-’가 자본가의 대액일(大厄日)일 필요는 없으리라. 장미는 핏빛도 아름다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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